겨울(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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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일기 - 백설기로 덮여버린 하루
기상 예보는 이미 심상치 않은 기운을 풍겼다. 자기 전에 창밖으로 내리던 눈송이는 밤새 쉼 없이 춤추며 땅 위를 덮어버렸다. 아침에 눈을 뜨고 거실 창문을 열었을 때, 세상은 마치 누군가 거대한 붓으로 흰 물감을 덧칠한 듯 낯설고도 환상적인 풍경으로 변해 있었다. 20센티미터쯤 내릴 거라던 예보는 정확했다. 나뭇가지마다, 차 지붕마다 두툼한 백설기로 덮어 놓은 것 같았다. 눈이 많이 내린 날에 일상의 루틴이 크게 흔들린다. 자가용 대신 대중교통을 택한 사람들로 버스 정류장과 지하철역은 평소보다 많이 북적였다. 출근길에 지하철 한 대를 보내고서야 겨우 자리를 잡았고, 퇴근길에는 두 대를 보내고 나서야 몸을 실을 수 있었다. 버스도 마찬가지였다. 질퍽한 눈길 위를 걷는 것만으로도 지쳤지만, 이처럼 북적이는 ..
2024.11.27 -
오늘의 일기 - 2024년 김장하는 날의 풍경
새벽의 찬 공기를 뚫고 모든 가족이 엄마의 집으로 모여들었다. 뜨거운 숨결처럼 일렁이는 소금물에 하룻밤 푹 젖었다가 기운 빠진 배추들은 물기를 빼고 줄 맞춰 대기 중이었다. 한쪽에선 커다란 대야가 붉은 양념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 속에는 마늘, 생강, 각종 젓갈, 고춧가루가 어우러져 깊은 바다처럼 매콤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비닐 장판 위에 앉아 양념을 한 바가지씩 떠내면, 소금물에 기가 죽은 배추들이 한 포기씩 배달되어 온다. 배춧잎을 한 장씩 펼치며 양념을 정성껏 골고루 바른다. 양념이 가득 찬 배춧잎은 마치 겨울의 차가운 품을 감싸 안는 듯 마지막 잎으로 꼭 감싸 안는다. 그렇게 한 포기, 또 한 포기, 테트리스를 하듯 김치통에 차곡차곡 담긴다. 배추는 끊임없이 등장했고, 우리는 "다음 배추..
2024.11.24 -
오늘의 일기 - 주말 아침 산책
피곤의 무게가 몸을 짓눌렀던 한 주가 끝난 밤, 나는 침대 속으로 일찍 몸을 던졌다. 평소보다 30분 일찍 잠에 들었더니,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더 이른 새벽에 눈이 떠졌다. 6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각, 나는 이불 속에서 게으르게 몸을 비비 꼬며 30여 분을 보냈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가만히 누워 있는 대신 일어나보자. 그렇게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집안에 맴도는 공기는 어제보다 차갑게 스며들었다. 스마트폰 화면에 찍힌 숫자는 영하 3도. 아, 잊고 있던 겨울이 어느새 발끝까지 다가와 있었다. 가볍게 양치를 마치고, 두터운 후드티와 포근한 카디건을 꺼내 몸을 감쌌다. 아직은 낯선 영하의 공기에 내 몸을 준비시키기 위해. 현관문을 열고 아파트 밖으로 나가니, 코끝을 스치는 바람이 한층 매서웠다..
2024.11.23 -
오늘의 일기 - 퇴근길 붕어빵
지갑에 현금을 챙겨야 하는 계절이 다시 돌아왔다. 차갑게 식은 바람이 뺨을 스칠 때, 붕어빵 굽는 냄새가 코끝을 스며든다. 퇴근길의 피로에 지친 발걸음을 붙드는 따뜻한 향기. 버스 정류장 앞, 손바닥 크기의 고소한 유혹을 지나치기란 어찌 이리도 어려운 일일까. 가끔은 슈크림 붕어빵의 달콤함에 마음을 내어주지만, 결국 다시 기본의 맛, 팥을 품은 붕어빵으로 돌아온다. 팥붕이의 깊고 부드러운 단맛이 혀끝을 감싸는 순간, 어린 시절 겨울의 기억들이 입안 가득 피어난다. 한때 천 원짜리 한 장으로 손 안 가득했던 붕어빵도, 이제는 세 마리에 이천 원부터라니. 붕어빵의 가격표 속 숫자는 높아지기만 하고, 주머니 사정은 늘 그대로인 듯하다. 기온은 떨어지고, 붕어빵의 가격은 오르고, 한숨 섞인 겨울이 또 이렇게..
2024.11.22 -
오늘의 일기 - 겨울 날씨 스위치가 고장난 하루
삼한사온 三寒四溫. 3일은 춥고 4일은 따뜻했던 우리나라의 겨울 날씨가 많이 달라진 걸 다들 눈치챘을 거다. 얼어 죽을 듯 추운 날씨가 2주 정도 계속되다가, 추위가 살짝 물러가면, 미세먼지가 매우 심해 숨 막혀 죽을 것 같은 날의 반복이다. 사람들의 의상은 날씨에 맞춰 자연스럽게 롱패딩으로 꽁꽁 무장하고 지낸다. 날씨가 매우 추운 날엔 추위를 막기 위해서, 미세먼지가 매우 심한 날엔 미세 먼지를 막기 위해서 코로나 때만큼 열심히 마스크를 챙기고 다니게 되었다. 농담으로 겨울 날씨 스위치에 '매우 추움'과 '미세먼지 매우 나쁨'이 서로 반대편으로 세팅된 게 아닌가 하는 말도 돌았다. 그런데 이 겨울 날씨 스위치가 고장이 났는지, 오늘은 초여름에 가깝게 18도까지 기온이 올라갔다. 추위가 이 정도 물러났다..
2024.02.14 -
오늘의 일기 - 갑자기 대설주의보가 발령되었다
제안 준비로 퇴근이 늦었다. 회의를 마치고 아이디어를 정리하는데 사무실이 시끄럽게 휴대전화들이 울기 시작한다. ❝20시 20분 대설주의보 발령❞ 잠시 후 또 한 번 울렸다. ❝21시 00분 대설주의보 발령❞ 집에 어떻게 가야 하지? 걱정하다 22시 정도 사무실을 나와서 신사역으로 향했다. 대설주의보라더니 거리는 비가 내린 정도로 젖어있었고, 일부 차량에만 눈이 조금씩 쌓이고 있었다. ❛대설주의보❜라고 하더니 생각만큼 많이 내리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서울시 경계를 넘어가자마자 가로수에 눈이 조금씩 쌓여있는 모습이 보였고, 버스를 내려 아파트 단지로 걸어가는 동안에는 이미 유리창을 다 가릴 정도로 눈이 쌓여있는 차들이 여럿 보였다. 앙상하게 가지만 남아있는 아파트 단지 화단 나무들도 두툼하게 하얀색 ..
2024.02.05 -
오늘의 일기 - 체감온도 영하 20도씨엔 디지털 귀마개를 해줘야지
올겨울 들어 가장 춥다는 어제보다 10도는 더 기온이 떨어질 거란 예보가 있었다. 체감 온도 영하 20℃. 하지만 겨울방학도 없는 직장인이라면 그보다 더 악천후에도 출근은 해줘야 한다. 어제 가장 추위를 느꼈던 부분을 보완한다면, 오늘 날씨도 견딜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기모가 덧대어있는 바지로 갈아입고, 긴급 상황엔 귀까지 덮을 수 있는 넉넉한 길이의 목도리로 바꿨다. 그리고 어제 날씨에 가장 취약점으로 확인된 ‘귀’를 보호하기 위해서 아주 오랜만에 디지털 귀마개(헤드폰)를 준비했다. 에어팟만큼 좋은 음질은 아니지만, 그래도 20만원대 꽤 성능 좋은 헤드폰이라 음악을 들으면서 귀가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차가운 겨울바람을 막아주는 효과가 뛰어났다. 이 정도 준비라면, 지금보다 10도가 더 떨어진다..
2024.01.23 -
오늘의 일기 - 올겨울 가장 추운 날
저녁을 먹고 설거지하고 침대에 잠깐 누웠는데, 손목을 강하게 흔드는 알람. 누가 새벽에 전화한 거야? 하고 애플 워치를 확인했더니, 기상 알람이었다. 진짜 잠깐 누웠는데, 정신없이 자버렸고, 부드럽게 애플 워치가 깨워주는 기상 알람이 이렇게 강하고 귀찮게 느껴진 게 처음이었다. 힘들게 자리에서 일어나 아침 뉴스를 켜두고 출근 준비를 시작한다. 어제 저녁 예보에 맞춰 단단히 껴입고 출근했지만, 옷 사이로, 머리 위로 지나가는 바람이 아주 매서웠다. 지하철역을 내려서 사무실까지 걸어 내려가는 10여분이 너무 길게 느껴질 정도였다. 점심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도 식당 문이 열릴 때마다 문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찬 바람에 발이 시렸다. 퇴근길에 보이는 식당에는 평소처럼 사람들이 많아 보이지 않았다...
2024.01.22 -
오늘의 일기 - 부산 여행에서 간과했던 사실
1월은 여행 비수기다. 기온도 낮고, 날씨도 흐리고, 바람까지 강하게 부는 겨울의 조용하고 쓸쓸한 바닷가를 기대했지만, 여행객들은 그런 불편함까지도 감수했는지 어디에나 넘쳐났다. 뭐… 나도 그런 악천후에 부산을 여행하고 있지 않은가. 조용하고 쓸쓸한 바닷가 맛집을 기대했지만, 어디를 가나 대기 인원이 줄을 섰다. 해운대 시장 유명한 떡볶이집이 그랬고, 부산 3대 국밥집은 더 했다. 모바일 줄서기 앱으로 사전에 예약하고 1시간 후에 가서도 현장에서 대기를 피할 수 없었다. 여행 비수기라고 생각하고 좀 한적한 1월의 부산을 기대했지만, 다들 비슷한 기대를 하면서 부산으로 왔던 것 같다. 줄 서서 대기하느라 원래 계획했던 여행 스케줄을 따라갈 수 없었다. 1월에도 부산은 붐빈다.
2024.01.20 -
오늘의 일기 - 15cm 눈폭탄 예보가 있던 날
하루 전부터 무시무시한 일기 예보가 있었다. 하루 종일 최대 15cm 폭설이 올 거라고 했다. 출퇴근 시간에 집중적으로 내려서 큰 피해가 예상된다고 했다. 하필 그런 날 광고주와의 미팅 일정이 있었다. 2주 전에 잡아둔 일정이라 이렇게 폭설이 오는 상황을 고려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최대한 정중한 차림의 복장을 하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발이 빠진다고 해도 덜 더럽혀질 신발로 골라 신었다. 출근 시간에 맞춰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마른 나뭇잎에 떨어지는 귀여운 소리가 '사락사락' 들리는 싸락눈으로 시작했다. ❛이제 시작인 건가? 이렇게 눈 폭탄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인가?❜ 생각하며 지하철을 타고 사무실 근처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지하철을 빠져나오며 서울 도심에 5cm 이상 쌓여있는 눈과 예보를 챙기지 못..
2024.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