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은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가 - 이정동
2026. 8. 8. 14:41ㆍBOOK
요즘 어디를 가나, 누구를 만나나 결국 대화의 끝은 '인공지능(AI)'으로 수렴한다. AI의 무시무시한 진화 속도에 등 뒤가 서늘해지는 '파멸론자'부터, 테크가 가져올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낙관론자'까지 매일이 의견 분분한 난장판이다. 빛의 속도로 바뀌는 세상에서 '대체 나는 이 AI를 어떻게 써먹어야 하나?' 머리를 싸매던 중, 운명처럼 이 책을 만났다.
사실 초판 발행일이 2024년 9월이라,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테크 판에서 너무 구석기 시대 얘기 아닌가?' 싶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웬걸. 2026년 지금 우리가 밤잠 설치며 하는 고민이나, 2년 전 저자가 던진 질문이나 소름 돋게 똑같다. 기술은 변해도 본질은 안 변한다는 뜻일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 무척 친절하다. 딱딱한 테크 이론 대신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가져와 기술의 진화를 진화론처럼 쉽고 찰지게 설명해 준다. 요즘 AI의 파도를 온몸으로 맞으며 ‘나만 뒤처지는 건가’ 문득문득 불안해지는 사람이라면, 가벼운 마음으로 펴서 묵직한 통찰을 얻어 갈 수 있는 책이다.

- 지은이 : 이정동
- 제목 : 기술은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가
- 출판사 : 김영사
- 출판 연도 : 2024. 09.
- 페이지 : 총 202면
책에서 건진 문장들
프롤로그
이 책은 기술진화의 논리를 살펴보는 데 목적이 있다. 자연스럽게 생물진화의 논리를 많이 차용하게 되는데, 단지 개념적 유비를 바탕으로 한 차용일 뿐이라는 점을 밝혀두고자 한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기술은 생물이 아니므로 생물진화의 논리를 곧바로 적용할 수 없다. 그래서 완결된 기술진화의 논리가 나올 때까지 설명을 위해 편의상 생물진화의 개념을 임시로 빌려온 것이다.
P. 10
기술 확산의 5단계와 캐즘
기술이 처음 인간사회에 모습을 드러낸 뒤 많은 사람이 채택하게 되는 확산의 과정에 대해서는 에버렛 로저스 Everett Rogers의 5단계 확산모형이 가장 직관적으로 설명한다. 신기술이 처음 등장하면 잠재적인 소비자 가운데 뭔가 새로운 것을 써보고 싶어 하는 성향의 사람들이 제일 먼저 채택한다. 이들을 혁신가 innovators라고 부르고, 평균적으로 인구의 약 2.5퍼센트에 해당하는 사람일 것으로 추산한다. 혁신가가 신기술을 채택하는 것을 보고 바로 뒤이어 초기 사용자 early adopter가 채택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전체의 약 13.5퍼센트로 추산한다. 이들의 입소문을 타고 약 34퍼센트에 해당하는 초기대중사용자 early majority가 등장하면서 신기술이 시장에 완전히 자리를 잡는다. 뒤를 이어 역시 34퍼센트 정도의 규모에 해당하는 후기대중사용자 late majority가 채택하기 시작하면 시장에서 신기술을 쓸 만한 사람은 대부분 채택한 상태가 되고, 기술은 정체기에 들어가게 된다. 마지막으로 신기술에 대해 끝까지 관망하는 태도를 취하던 16퍼센트 정도의 사람이 마지못해 지각사용자 laggards로서 마지막 자리를 채운다. 이 누적사용자 비율이 100퍼센트에 이르면 모든 사람이 신기술을 채택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모든 사람이 채택하는 아름다운 결말에 이르게 되는 기술은 극소수다. 대부분 혁신가 몇 명이 써보는 단계에 머무르거나, 특히 얼리 어답터라고 부르는 초기사용자 그룹을 넘어 초기대중사용자가 사용하는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워낙 많은 신기술이 이런 간극을 넘지 못하고 사라지기 때문에 이 단계를 틈, 즉 ’캐즘 chasm’이라고 한다.
기술은 어떻게 확산될까? P. 45 - 47
사회를 변화시키는 범용기술
인간은 기술을 만들지만, 기술 또한 인간과 사회에 영향을 미친다. 기술과 사회의 관계를 생각할 때 중요한 개념 하나가 범용기술 General Purpose Technology이다. 범용기술은 영어의 머리글자를 따 GPT라고 하기도 한다. 요즘 유행하는 생성형 인공지능의 대표 모델인 챗GPT에서도 GPT라는 단어를 쓰지만, 이때는 ’생성형 사전 학습 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이라는 뜻으로 쓰기 때문에 두 GPT는 다른 의미다.
P. 66
기술은 사회를, 사회는 기술을 바꾼다.
기술은 생물이 아니다. 기술이 진화한다고 하지만, DNA가 없을 뿐 아니라 스스로 후손을 낳지 못하기 때문에 생물진화의 이론이 그대로 적용될 리 없다.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인간의 의지다. 생물진화는 랜덤한 돌연변이와 자연환경에 의한 선택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기술진화에서는 인간이 의지를 가지고 새로운 기술을 만들고, 선택하고, 전수한다. 생물의 미래는 예측할 수 없지만, 기술의 미래는 예측할 수 있다. 보다 엄밀하게 표현하자면, 기술의 진화는 인간의 의도하는 만큼, 의도하는 방향대로 펼쳐진다. 기술의 미래는 인간의 미래이기도 하다.
P. 140
많은 상상이 오가는 가운데 지금도 인간의 능력을 확장하고 싶은 의도는 기술진화에 큰 영향을 미친다. 챗GPT와 같은 거대 인공지능 언어 모델은 다양한 질문에 더 정교하고, 더 빨리 답하기 위해 무서운 속도로 초거대화되고 있다. 그 결과 거대 인공지능 모델들이 전 세계적으로 빨아들이고 있는 전력 에너지의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차별화되고 싶은 욕구도 여전히 막강한 영향을 미친다. 인터넷 전자상거래 웹사이트를 방문하면 매일같이 저걸 왜 살까 싶은 희한한 물건이 등장하고, 최신 기술을 장착한 신상 제품을 오로니 남보다 먼저 가지기 위해 오픈런의 긴 줄이 생기고 있다.
P. 160
기술진화의 속도를 높이는 인공지능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가 인간의 본질을 요약한 문장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사진의 존재를 고찰하고, 상상하고 의사소통한다. 역으로 말하면, 인간처럼 언어를 사용하는 그 어떤 존재가 있다면 인간이라고 간주해도 된다는 뜻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언어를 ‘인간처럼’ 처리하고 사용한다. 따라서 생성형 인공지능은 인간의 사고를 모사하고 있다. ‘인간처럼’ 상상하고 의사소통한다. 인간처럼 보인다는 것이지 결코 인간은 아니다. 그러나 생성형 인공지능을 옆에 두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 자리에 마치 인간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P. 178
미래를 예측하는 최고의 방법은 미래를 만드는 것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기술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를 수동적으로 예측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기술이 진화하는 데 가장 중요한 환경이 바로 인간사회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원하는 방향으로 기술이 진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뜻이다. 앨런 케이 Alan Kay가 말한 “미래를 예측하는 최고의 방법은 스스로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다.”
P. 188
포캐스팅이 아니라 백캐스팅
미래를 예측하는 일을 포캐스팅 forecasting이라고 하는데, 기술의 미래를 예측하는 데는 백캐스팅 backcasting이 더 중요하다. 백캐스팅은 우리가 소망하는 미래 인간사회의 모습을 상상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지금부터 단계별로 무슨 기술이 필요할지, 거기에 맞추어 어떤 제도 변화가 필요한지를 역으로 정해가는 것이 핵심이다. 포캐스팅이 지금까지의 추세를 연장해 미래를 짐작하는 수동적인 과정이라면, 백캐스팅은 인간의 의지를 담은 미래의 비전으로부터 현재의 전략을 정해나가는 적극적인 과정이다. 동물도 원초적인 수준에서 포캐스팅을 하지만, 결정적으로 백캐스팅을 하지는 못한다. 오직 상상하고 소망하는 힘을 가진 인간만이 백캐스팅을 할 수 있다.
P. 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