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이별, 죽음에 관한 짧은 소설 - 정이현 / 임솔아 / 정지돈

2023. 6. 5. 21:37BOOK

많은 경우 프로젝트의 시작은 정의(定義 : 어떤 말이나 사물의 뜻을 명백히 밝혀 규정함)에서 시작한다. 똑같은 단어에도 각자 생각하는 범위와 크기가 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것을 정확하게 맞추는 과정이 가장 먼저다. 그렇게 사전에 정의를 동기화하고 진행한 프로젝트도 진행 과정에서 어긋나거나 오해가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하물며 프로젝트도 그러한데 사랑은 어떨까? 이별은 그리고 죽음은… 이 소설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사랑에 관해, 이별에 관해 죽음에 관해서 새롭게 정의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정말 책 제목대로 짧은 소설 3편이 담긴 이 앤솔러지는 출퇴근 길 지하철에서 후루룩 다 읽어 버렸다. 짧게 읽어버렸지만 그 여운은 더 길게 갔다. 특히 정지돈 작가의 작품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를 읽고 죽음에 관해서 깊게 생각했다. 영화 매트릭스의 주요 대사가 떠오르기도 했다. ❝중요한 건 정신이야. 정신이 죽으면 몸도 죽지.❞란 대사를 다시 곱씹어 보게 되었다.

 

아직도 난 정확하게 정의 내리지 못하는 단어들이 너무 많다. 이 세 가지를 제외하고도 너무너무 많다. 사랑, 이별, 죽음이란 단어를 자신만의 언어로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게 된다면 인생이란 프로젝트를 마무리할 때가 가까이 오지 않았을까? 죽을 때까지도 죽음에 관해서 사랑에 관해서 그리고 이별에 관해서 영영 모른 채 떠나게 될지도 모르지.

 

너무 자세히 소설 이야기를 풀면 스포일러가 될 테니까. 직접 읽어 보기를 추천한다. 제목 그대로 짧은 소설이니까...

 

사랑, 이별, 죽음에 관한 짧은 소설 - 정이현 / 임솔아 / 정지돈

 

  • 지은이 : 정이현 / 임솔아 / 정지돈
  • 제목 : 사랑, 이별, 죽음에 관한 짧은 소설
  • 출판사 : 시간의흐름
  • 출판 연도 : 2023. 04.
  • 페이지 : 총 114면 

 

두 사람은 모든 게 달랐어요. 그냥 다른 세계의 사람들처럼 보였어요.

태어날 때도 자라는 동안에도 어른이 되어서 경험한 삶에도 접점과 교차점이 없는 사람들.

이런 두 사람이 사흘 만에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되었을까요. 그게 경이롭고 끔찍하게 불가사의했어요!

Part 1 : 사랑에 관한 짧은 소설 - 우리가 떠난 해변에, 정이현, P. 24 - 25

 

모든 멈춘 것은 퇴색하고 틈이 벌어지고 낡아간다. 움직이지 않는 바위는 제자리에서 조금씩 바스러지고 있다. 어느 날 회색 재로 풀썩 무너져 내려 실체조차 없어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 사랑도 언젠가 그처럼 소멸하리라는 희망만이 그동안 설을 버티게 했다.

Part 1 : 사랑에 관한 짧은 소설 - 우리가 떠난 해변에, 정이현, P. 34 - 35

 

민영은 껍질을 벗긴 고구마를 정화에게 건넸다. 정화는 고구마를 받아 베어 물었다.

❝오빠 변했어.❞

❝알지.❞

정화가 부엌으로 가 김치를 꺼내 왔다. 고구마 위에 김치 한 점을 얹어 민영에게 주었다. 자신의 고구마에도 김치를 얹어 먹었다. 역시 김치랑 먹어야 고구마가 맛있다고 정화는 말했다. 설거지를 끝낸 민기가 거실로 나왔다. 정화와 민기는 사소한 모든 일로 티격태격했다. 사소한 일에만 그랬다. 사소하지 않은 일도 마침내 사소하게 만들 수 있게 되었다.

Part 2 : 이별에 관한 짧은 소설 - 쉴 곳, 임솔아, P. 58

 

졸탄은 부활에 대해 공부할수록 육체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중요한 건 정신이었다. 우리 정신의 엑기스를 보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디에서나 부활할 수 있었다. 심지어 나무나 꽃 속에서도 정신이 깃들 수 있다고 졸탄은 말했다. 정신의 엑기스는 정보고 DNA는 정보들의 배열이기 때문에 기존의 DNA에 다른 정보를 덧입히는 방식으로 존재를 새기는 것이다.

일종의 빙의 같은 거죠. DNA나 정보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있다면 어디든 빙의될 수 있어요.

Part 3 : 죽음에 관한 짧은 소설 -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 정지돈, P. 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