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6. 7. 21:40ㆍBOOK
가끔 그런 사람이 있다. 업무에서도 부러울 만큼 재능있는데, 업무 외적으로도 뛰어난 능력을 갖춘 사람. 부러워하는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신경 쓰느라 그 앞에서 더 조심하게 되는 사람. 그래도 함께 있으면 많이 배우고, 나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어서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기다리게 하는 사람. 물론 그런 사람은 가뭄에 비 오듯 해서 자주 접하기 힘든 사람인 경우가 많다.
에세이를 읽다 보면 나랑 비슷한 삶을 사는 것 같은데, 글을 아주 재미있게 쓰는 작가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그러니까 출판을 한 거겠지만…) 그런데 그런 작가들 글 쓰는 재능이 전부가 아니다. 글을 재미있게 쓰는데, 그림을 잘 그리네. 글을 재미있게 쓰는데, 음반도 제작한다네. 글을 재미있게 쓰는데, 피아노 연주도 전문가 수준이라니… 인생 참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하는 그런 작가를 오늘 또 만났다.
임이랑 작가를 소개한 책날개 부분을 읽어보면 글을 쓰고, 노래를 짓고, 베이스를 연주한다. 책도 몇 권 냈고, 밴드에서 활동 중이며, EBS 라디오를 진행하기도 했단다. 나는 하나도 가져보지 못한 재능을 몇 개나 가진 건가. 임이랑 작가가 가진 모든 재능이 다 부러웠지만 가장 부러운 건 어머님께 저렇게 스윗한 멘트를 날릴 수 있는 재능이다. 작가님의 어머님으로부터 타고난 다정함을 배우지 않았을까 생각되지만, 나는 감히 낯간지러워서 절대 입 밖으로 내지 못할 것 같은 대사다.
한번은 지난밤에 꿈을 꿨다며 ❝같이 어딘가를 걷다가 네가 땅에서 거대한 금덩어리를 캐냈지 뭐야! 아마 너의 일이 어마어마하게 잘되려나 보다❞고 흥분해서 이야기하는 엄마를 보고 '이숙희 씨는 내가 이뤄온 일들이 자랑스럽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만 않을 뿐 사실을 내 삶에 거대한 금덩어리가 존재하기를 원하는구나!' 짐작하게 되었다. 내 삶에 대한 엄마의 태도가 쿨할 수 있는 것은 천성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을 깎고 또 깎아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농담처럼 ❝내게 이번 생에 부여된 행운은 좋은 엄마를 만나는 데 다 썼다❞라고 대답하곤 한다.
P. 47
부모님은 절대로 이 블로그를 모르실 거다. 그러니 이 공간을 빌려서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당신들을 만난 건 내 생에 가장 큰 행운이었다고.
- 지은이 : 임이랑
- 제목 : 불안이 나를 더 좋은 곳으로 데려다주리라
- 출판사 : 수오서재
- 출판 연도 : 2022. 08.
- 페이지 : 총 230면
Prologue
100점짜리 하루를 열망하지만, 불안과 함께라면 완벽한 하루를 살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도 다 포기한 상태로 0점짜리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보다는 50점짜리 하루가 낫다.
P. 14
전화를 끊으며 ❝오늘도 전화해줘서 고마워. 딸 목소리를 들으니까 엄마는 행복하네❞하는 이숙희 씨의 마지막 인사를 들으며 나는 그 천성적인 다정함에 또 한 번 감탄한다. 나는 천년을 살아도 그같이 다정한 사랑은 하지 못할 거다.
P. 51
각자 몸의 컨디션이 다르듯 마음의 컨디션도 다르다. 위가 약해서 소화를 잘 못 시키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불안에 취약한 사람도 있다. 멈춰 있는 위를 운동시키기 위해 산책을 나서거나 소화제를 먹듯 불안이나 우울 같은 마음의 상태에도 각각의 대처방안이 필요하다.
P. 56
밝은 사람은 무던한 성격을 지닌 사람이라고 쉽게 오해받고 말지만, 사람은 그것보다는 좀 더 복잡한 존재다. 충분한 사랑을 받고 티 없이 자라 큰 어려움을 겪지 않고 에너지가 넘치기에 밝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본인의 예민함을 다스리며 최선을 다해 사회적으로 밝은 사람이고자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P. 57
그래도! 어쩌면! 혹시라도! 만에 하나!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쓸 수 없는 것들이 있을 거라 생각을 하며 조금이라도 더 다르게 쓰겠다고, 단 한 사람이라도 더 나의 문장과 멜로디에 감명받고 그 전율이 심장까지 닿으리라 생각하며 나만의 색을 입혀보려고 용을 쓰고 몸부림을 친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다. 세상에 나만 쓸 수 있는 글과 나만 쓸 수 있는 멜로디는 없다. … 나 없이도 세상은 어떻게든 굴러가게 되어 있다.
P. 73 - 74
세상에 불편한 것들이 많아지면서 작품 속에서 피해야 할 지뢰 같은 주제와 사람이 빼곡해진 지금은 더 신중하게 두드려가며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 결과물을 고르고 펴낸다. 이전보다 훨씬 효율이 떨어지는 창작자가 된 기분이지만, '이쪽이 옳다'는 믿음으로 돌다리를 두드리며 건넌다.
P. 90
나는 글을 쓸 때는 음악이 없으면 전혀 쓰지 못한다. 그렇다고 아무런 음악이나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보통 뭔가를 쓸 때는 목소리가 포함된 음악을 듣지 못한다. 네 개 이상의 악기가 함께 연주하는 곡도 들을 수 없다. 작년에 한없이 늘어지는 음악을 틀어놓고 글을 쓰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타자를 치는 속도가 느려지고 자꾸 어두운 이야기만 써 내려가게 되었다. '이렇게는 안 되겠구나'라고 생각한 이후로는 리듬이 적당히 당겨지지만 그렇다고 정신을 사납게 만들지는 않는 음악들을 주로 듣는다. 그런 의미에서 칠리 곤잘레스나 빌 에반스의 음악은 완벽한 배경음악이 되어준다. 이 두 사람의 앨범이 없었다면 나의 밥벌이가 얼마나 힘겨웠을지, 생각하면 아찔하다.
P. 100 - 101
뮤지션인 나는 너저분하고 어수선한 분위기를 즐기는데, 반대로 작가인 나는 주변이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편이다. 비닐 천막 안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대기하는 나와 깊은 밤 홀로 컴퓨터를 켜고 앉은 내가 다르듯이 음악 할 때 쓰이는 에너지와 글을 쓸 때 쓰이는 에너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차분하게 모든 것을 가라앉히고 먼지를 치우고 방 안의 공기가 바닥에 내려앉으면 그제야 그 공기를 바닥에서 5센티미터만 띄울 수 있도록 작게 연주곡을 재생한다.
P. 108 - 109
곡을 쓰고 글을 지을 때, 스튜디오에서 방송을 녹음할 때, 강연하거나 행사를 할 때 모두 다른 에너지로 살아가지만 내가 하는 그 모든 일들은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 나 자신의 감각을 만족시키고 마음의 어둠을 달래고 세상과 연결된 상태로 계속 살아가는 일에 대한 결과일 뿐이다.
P. 112
우리는 모두 각자의 보따리를 가지고 살아간다. 커다랗고 튼튼한 보따리를 가진 사람은 슬쩍 보기에도 귀중한 재료를 잔뜩 담은 상태로 풍요로운 이야기를 이어간다. 얼핏 봐서는 화려하게 번쩍거리지만, 막상 그 속을 들여다보면 별 쓸모없는 찌꺼기만 조금 굴러다니는 보따리를 가진 사람도 있다.
P. 121
우린 완전히 친구는 아니지만, 서로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서로의 성장을 돕는다는 점에서는 친구 비슷한 거니까, 앞으로도 부디 제 인생에 등장인물이 되어주세요. 서로 솔직한 마음을 잃지 않되, 최선을 다해 다정한 사이가 되면 좋겠습니다. 무한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보냅니다.
P. 133 - 134
세상에는 조심스러운 겁쟁이를 위한 즐거움보다 무모하고 부주의한 사람을 위한 즐거움이 훨씬 많이 널려 있기 때문에.
P. 188
10년 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종류의 대응 기제였지만 10년 후에는 어떤 더 나은 무기들이 내 손에 쥐어질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오늘 치 불안을 멀리 밀어낸다. 불안의 계절은 이번에도 나를 정신 없이 흔들다가 작은 흔적을 남기고 사라질 것이다.
P. 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