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6. 3. 17:24ㆍBOOK
'아무튼' 시리즈에서 신간이 추가되었다고 해서 가볍게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서문에서부터 뭔가 좀 특이했다. 저자가 ADHD를 가진 분이라고 자기를 소개해서 말이다. 사실 최근에서야 성인 ADHD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혹시 나도 그런 사람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큰 문제 없이 사회생활을 잘(?)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면서 난 그 부류의 사람은 아닌가 보다 생각했었다.
프롤로그
지금부터 이어지는 내용은 ADHD인답게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지 않은 20년간의 어수선한 변화의 기록이자, 정리 정돈을 강력히 거부함으로써 발생한 혼돈이 천천히 소멸해가는 과정이다.
P. 11
책을 읽으면서 ADHD에 관한 내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저자는 ADHD를 가지고 있는 분이지만, 결혼해서 두 자녀를 두고 남아공, 영국, 미국에서 이민자 신분으로 자기 일을 잘 꾸려온 워킹맘이기 때문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날개에 데이터 과학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저자의 약력을 확인했다. ADHD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프로그래머로 체계적으로 사고하고 체계적으로 업무를 처리한다고 했다. ADHD로 어려움을 겪지 않더라도 가정에서 업무에서 대단한 성과를 남긴 게 분명한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 내용을 책으로까지 묶어 냈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책을 다 읽고 저자에 대한 경외심과 함께 나도 성인 ADHD 진단을 받아보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내 상태를 그렇게까지 객관적으로 보는 게 쉽지 않아서 진단을 받기까지는 더 큰 결심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분명 '정리'를 주제로 이야기하는데 ADHD라는 걸림돌이 더 자주 등장한다. 그럼에도 삶을, 가족을, 일을 대하는 저자의 태도를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아무튼 시리즈 중에서도 Best 3에 넣고 싶어질 정도다. '애자일 방식으로 두 주를 한 스프린트로 잡아서'란 에피소드와 '디지털 호더' 에피소드는 IT 업계에 발을 담그고 있는 사람이라면 특히 더 재미있게 다가올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마지막으로 저자의 온라인 프로필을 검색해서 팔로우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지은이 : 주한나 Hanna Kroukamp
- 제목 : 아무튼, 정리
- 시리즈 : 아무튼
- 출판사 : 위고
- 출판 연도 : 2023. 04.
- 페이지 : 총 135면
정리 필터 작동이 수동이라는 것은…
내가 하던 일들을 그때그때 정리하지 않고 널어두는 이유는 ADHD가 컸다. 한 가지에 집중하지 못하고, 무언가 다른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바로 그것을 하고 싶어 했다. 게다가 이것저것 자주 잊어버리니 정리한답시고 치워버려 눈에 안 보이면 완전히 잊을까 봐 불안했다. 집중 못함, 딴짓 벌임, 정리 못함, 이것이 삼위일체를 이루었다. 뭔가를 하다가 다른 것에 관심이 가면 당장 그에 관한 것을 꺼내 펼쳐보지만 그래도 하던 것을 마저 끝내야 한다는 책임감과 또 다시 마무리 못 짓는 사람이 될 듯한 불안감, 지금 치워버리면 영영 잊게 될까 봐 하던 일을 정리하지 못하는 망설임이 뒤섞였다.
P. 20
청소빚 갚기
결혼 20년 차이고 둘 다 아주 쉬운 성격은 아닌데도 안 싸우고 잘 사는 이유 중 하나는 상대에게 바라는 바는 거의 없는 반면 상대에게 절대로 빚지고 싶지 않은 욕구는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나와 남편은 '지금 여기가 지저분한 상태인가'를 탐지하는 레이더망은 약하지만, '지금 내가 빚진 상태인가'는 엄청나게 잘 포착한다. 그래서 우리 집은 심하게 너저분하다가 심하게 깔끔해지기를 반복한다. 나와 남편 둘 중에 하나가 정리를 시작하면 나머지 사람도 그냥 있기가 불편해져서 곧바로 '아, 나도 뭔가 치워야겠다' 모드로 전환된다. 한 사람이 설거지를 하면 다른 사람은 방 정리를 하고, 빨래를 시작하면 청소기를 돌린다.
P. 31 - 32
청소빚 갚기
나는 남편에게 단 한 번도 네 방 치워라, 왜 이런 걸 샀느냐, 하는 말을 진심으로 따지며 한 적이 없다. 왜냐면 어떤 싸움이든 주먹을 날릴 때에는 한 대 맞을 각오를 해야 하는 법인데, 나는 특히나 정리 정돈에 관해서는 맷집이 형편없는, 정말 어디 내놔도 할 말 없는 구제 불가능의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P. 34
정리로의 도피
금요일. 나는 할 것이다! 세금 서류 정리를 정말 끝낼 것이다! 그리고 정말 다 끝냈다. 막상 시작해보니 끝내기까지 두 시간밖에 안 걸렸다. 반 년 가까이 미루고, 거기에 일주일 휴가까지 내고도 이걸 피하느라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허무함이 몰려왔다.
P. 51
정리로의 도피
세상일이 참 다양하지만 본질은 비슷할 때가 많다. 집안일이든 회사 일이든, 보고서든 원고 작업이든, 할 일을 정의하고 그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할 방법을 찾고 시간을 계획하여 작업을 시작하고 깔끔하게 정리해가는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언제나 제일 하기 싫다. 나는 지금 당장 성취감을 느끼고 싶다. 그리하여 대체할 활동을 찾는다. 코드 재정리 대신에 서랍과 옷장을 뒤집어 정리한다. 디자인 문서를 훝어보는 대신에 부엌 바닥을 스캔해 구석구석 걸레질을 한다. 그렇게 꼭 해야 할 일은 미룬 상태로, 뭔가 정리하고 해냈다는 성취감을 얻는다.
P. 52
모드 전환
출퇴근 할 때의 지옥철, 러시아워의 복닥거림을 다들 증오하는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하루 중 그때가 오롯이 혼자 즐길 수 있는 시간이라는 이도 있었고, 출근할 때는 사회인으로, 퇴근할 때는 가정의 나로 변식하기 위한 준비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좋다는 이도 있었다. 정체성과 역할을 구분하는 시간과 공간의 막, 또는 터널이라고 해야 할까. 사무실로 가면서는 집에서 해야 하는 일과 아이들 학교 관련 문제를 잠시 지우며 업무 모드로 전환하고, 사무실을 떠나면서는 끝내야 하는 업무와 다음 날의 미팅을 지운다. 그렇게 구역 정리를 하고, 출퇴근은 그런 구역을 통과하는 포털이 된다. 아무리 예쁜 상자를 마련해 라벨까지 붙여두어도 옷장 안이 엉망이 될 때가 있듯이 직장인과 살림인 모드가 늘 완벽하게 구분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모드 전환의 시간과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다.
P. 94 - 95
디지털 호더
벌써 수천만 세대를 거쳐 진화한 검색 모델은 당신의 이름이 홍길동이든 심청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당신이 정확하게 어느 아파트 몇 동 몇 호에 사는지도 관심없다. 하지만 당신이 어던 단어를 검색하고 어던 물품을 선호하고 어디에 돈을 쓸 예정인지에는 아주 관심이 많다. 그 정보를 사려고 대기하고 있는 이들 역시 당신의 이름이나 당신의 전 애인에게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당신이 새 귀걸이를 찾고 있다는 정보는 아주 짧은 시간 내에 정보상들에게 팔릴 것이고 그들은 당신의 검색 결과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 그 정보에 돈을 지불할 것이다.
현대인으로 살아가면서 모델하우스급의 깨끗한 온라인 프로필을 유지하기는 불가능하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우리는 어딜 가든 온갖 발자국을 남기며 부스러기를 질질 흘리고 다닌다. 그리고 그 흔적들은 아주 정성스럽게 포장되고 가공되어 수천만의 저장소와 검색 모델들이 반기는 먹기가 된다. 내 마음을 나보다 더 잘 아는 듯한 검색 결과는 바로 그 결과물이다.
P. 118
기억의 수납장
아이들의 방은 정리하라고 잔소리를 할 수도 있고 안 쓰는 물건은 내가 알아서 정리하고 버릴 수도 있지만, 아이들의 기억 정리는 내가 어찌할 수 없다. 나이를 더 먹으면서 나의 기억 수납장은 빛이 바래고 무너지고 결국 없어질 것이고, 마지막은 아이들의 수납장에 이미지로 남게 되겠지. 엔트로피의 법칙대로 결국은 그마저도 다 없어질 테고.
P. 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