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5. 20. 22:43ㆍBOOK
모든 문화는 시대를 반영한다. 영화, 음악이 그렇듯 소설도 그 시대 사람들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진화를 거듭하지 않나. 최근 소설을 읽으면서 예전 교과서에 등장했던 소설의 차이점을 발견하고 있다. 예전 국어 교과서에서 읽었던 그러니까 내 나이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오래된 소설들의 경우 소설의 앞부분에 소설의 배경, 등장인물, 인물 간의 갈등 상황 등이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소설도 있었을 것이다) 주인공은 어떤 성격에 어떤 외모를 가졌는지, 어떤 배경에서 누구와 자랐으며, 현재 어떤 어려움이 그를 괴롭히고 있는지 등 소설을 읽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초반 설명이 끝나야 비로소 이야기를 시작했던 것 같다. (물론 그렇지 않은 소설도 있다) 최근 소설에선 소설의 재미를 위해서 이런 스포를 금지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소설에서도 책의 3분의 2를 읽고서야 주인공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이 소설에서 주인공의 이름이 중요한 포인트는 전혀 아니다) 설정과 배경을 적당히 숨기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뙇! 노출하는 게 요즘 소설의 트렌드 아닐까? 그런데 이런 트렌드 너무 쫓아가다 보면 초반에 몰입이 어려워 읽기를 포기하게 되는 경우도 종종 만나게 된다. 이 소설에서는 이런 의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있었다면 그런 의도마저도 너무 자연스럽게 숨겨 놓고, 소설을 읽으면서 따라가는 동안 자연스럽게 알게 한다는 점에서 최근 읽었던 소설 중 몰입도가 가장 높았던 소설이다.
10년 전 발행했던 소설을 개정해서 2020년에 새로(2판으로) 출간된 이 소설은 한 모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설에서는 먹고 살기 위해서 좁은 골목길의 작은 글짓기 교실(최근엔 '글짓기'를 '글쓰기'로 많이 쓰는 편인데...)을 운영하는 김작가(엄마)와 엄마를 김작가로 부르는 조금은 버릇이 없어 보이는 딸(영인)이 투덕거리며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주인공을 통해 작가 본인이 글을, 소설을 쓰게 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다. 억지로 쥐어짜듯이 쓰는 게 아니라, 쓸 수밖에 없어서 쓰는 작가 본인의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다. 글을 잘 쓰는 방법을 직접적으로 가르쳐주는 교재는 아니다. 하지만 글을 읽으면서 주인공이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나의 글쓰기를 다시 생각하게 되고, 또 더 개선될 수 있는 부분을 고민하게 되는 부분이 많았다. 글 쓰는 걸 전문적으로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좋아하게 될 소설이다.
- 지은이 : 강영숙
- 제목 : 라이팅 클럽
- 시리즈 : 오늘의 작가 총서
- 출판사 : 민음사
- 출판 연도 : 2020. 05.
- 페이지 : 총 354면
내가 글을 쓰게 된 이유가 그 차가운 공백기 탓인지 아니면 나의 의지 때문이었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러나 어쨌든 내 인생에 구멍이 뻥 뚫린 듯한 그런 시간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P. 13
그즈음 나는 편지를 쓰는 일에 조금 지쳐 있었다. K와의 관계가 안정되면서 반복되는 얘기만 오가는 느낌도 없지 않았다. 편지라는 형식이 갖는 한계를 알아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김 작가가 쓰던 원고지를 들고 그 커피숍으로 가 소설이라는 걸 쓰기 시작했다. 왜 시가 아니고 소설이었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그냥 내 몸속에 흐르던 차가운 강물이 시킨 일이었다고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다.
P. 33
어디선가 읽은 또 하나의 끔찍한 거절 편지가 있다.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고 초조해하고 있을 작가 지망생에게 보낸 편집자의 답신.
❝당신의 원고를 읽는 일은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그 어떤 작품도 당신 작품처럼 완성도가 높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 출판사가 당신의 작품을 출판한다면 우리는 다시는 당신이 작품처럼 뛰어난 작품을 출판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앞으로 수천 년을 기다려야 당신 작품을 뛰어넘는 작품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당신의 작품을 거절해야만 합니다.❞
P. 118 - 119
나는 그때 뭔가를 자세히 들여다본다는 것,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을 탐구하는 것이 글을 쓰는 데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공간을 제대로 설정하라, 그러면 글은 생각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게 써지고 훨씬 더 힘 있게 진행된다!
P. 216
소설 속 주인공의 엄마인 김 작가는 그렇게 알뜰살뜰 딸을 챙기는 엄마의 모습으로 그려지지는 않았다. 시작부터 불안불안한 모녀 사이로 묘사된 이 둘의 관계가 언제 폭발하나 지켜보면서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기며 읽었다. 그런데 주인공이 갑자기 미국으로 떠나는 때 김 작가에게 이런 편지를 받게 된다. 물론 이 책을 읽는 우리는 나중에서야 이 편지의 내용을 듣게 되지만 말이다. 엄마만이 할 수 있는 응원의 메시지. 무심한 듯하면서도 딸을 진심으로 아끼는 엄마라는 사실이 한 통의 편지로 잘 설명된다. 역시 김 작가다.
❝너는 오후 3시에 태어났어. 오후 3시는 누구나 후줄근해지는 시간이지. 매일 오후 3시가 되면 진한 커피를 한 잔 마셔. 그리고 '난 지금 막 세상에 태어난 신삥이다.' 생각하며 살아. 뭘 하든 우울해하지 말고. 너는 오후 3시에 태어났어. 그걸 어떻게 아냐고? 내가 널 낳았으니까. 하루에 한 번씩 그걸 생각해야 한다.❞
P. 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