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러키 스타트업 - 정지음

2023. 5. 18. 23:21BOOK

스타트업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책이 (적어도 나에게) 재미있는 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실재하는 사람들에 대입하기가 쉬워서가 아닐까 생각했다. 전 직원이 4명이었던 회사도 다녀보고, 5명인 회사도 다녀본 경험이 있다. 그런 작은 스타트업이 어떻게 성장했는지 똑똑하게 기억하는 사람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봤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사수로, 후임으로, 동료로 만나기도 했고, 클라이언트나 그 미친 XX로 만나기도 했던 사람들을 소설에서 만날 수 있었다.

 

'언러키 스타트업'이란 책도 사실 생각으로 골랐던 책인데, 여기 등장인물들 중 대표란 사람은 음… 쉽게 만날 수 있는 그런 레벨이 아닌 인물이다. 구체적으로 다 이야기하면 큰 스포일러가 되니까, 성 인지 감수성과 공감 능력이 매우 부족하지만 자존심은 매우 강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런 대표를 쉴 틈 없이 뒷담화하는 직원들의 이야기가 시트콤처럼 26개 챕터로 이어진다. 20화가 진행될 때까지 계속되는 직원들의 대표 험담을 읽으면서 내내 불안했던 건, 계속 나쁘게 묘사하고 있는 이 대표도 4–5명의 직원에게 급여를 밀리지 않고 챙겨주는 사람이라는 걸 소설 속 화자와 그의 동료들은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지금도 많은 스타트업 대표님들은 매달 급여일이 돌아올 때마다 돈 들어올 구멍을 살피느라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다. 그런 불편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을 마지막까지 놓지 못했던 건 순전히 브런치북출판프로젝트에서 대상을 받으며 많은 팬을 보유하고 전업으로 글 쓰는 사람이 된 작가의 글맛 때문이다. 'MZ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라고 감히 닉네임을 붙여 보고 싶어졌다. 이 소설 직장 상사 잘근잘근 씹는 재미가 그리운 분들에게 강추, 하지만 당신이 스타트업 대표라면 비추!

 

책에 등장하는 '국제마인드뷰티콘텐츠그룹'이란 독특한 이름의 스타트업 회사도 수소문해보면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는 실재하는 기업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답이 없어 보이는 이 회사에서도 사람들을 만나고 동료애를 쌓으면서 뚝딱뚝딱 굴러가는 모습을 보면서 예전 생각이 났다. 시킨 사람 없지만 할 수밖에 없는 야근을 하면서 동료들은 서로를 '야근 요정'으로 불렀던 기억이 난다. 그 요정님들 다들 잘 지내시는지 궁금하다.

 

언러키 스타트업 - 정지음

 

  • 지은이 : 정지음
  • 제목 : 언러키 스타트업
  • 출판사 : 민음사
  • 출판 연도 : 2022. 10.
  • 페이지 : 총 262면 

 

프롤로그 - SGC TES

9. 귀하가 회사에서 주로 하는 생각에 체크하십시오.
*복수 응답 가능

☑︎ 집에 가고 싶다.
☑︎ 퇴사하고 싶다.
☑︎ 하기 싫어 죽겠네.
☑︎ 이 돈 받고 이걸 해야 하나?
☑︎ 이렇게 벌어서 언제 집 사나.
☑︎ 혹시 나 우울증일까? (혹은 이미 우울증이다)
☑︎ 쟤는 대체 왜 살지?
☑︎ 대체 왜 나한테만 이러지?
☑︎ 저런 인간도 취업(승진)을 하는구나
☑︎ 죽여 버리고 싶다 또는 내가 죽고 싶다

12. 귀하가 퇴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복수 응답 가능

☑︎ 지인들 또는 사회의 시선
☑︎ 카드값, 월세, 가족 부양 등 고정 지출
☑︎ 경력과 연차의 애매함
☑︎ 재취업 가능성에 대한 불안
☑︎ 내일채움공제, 중소기업청년전세대출 등 국가 지원 혜택
☑︎ 기타

 

1화 - 김다정 DJ 주임의 폭발

'국제마인드뷰티콘텐츠그룹'은 시답잖은 인터넷 강의들을 팔아 매출을 내는 회사였다. CTO는커녕 개발자 한 명 없음에도, 박국제는 회사를 소개할 때마다 'IT/미디어 기업'이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양심이 있다면 '헬시 닥터 제임스의 스트롱 뷰티', '수면 닥터 제임스의 슬리핑 뷰티', '청년 닥터 제임스의 청춘 뷰티' 시리즈를 몇십만 원에 팔며 그런 소릴 할 수는 없을 거다. 하지만 놀랍게도 강의는 매달 회사가 망하지 않을 만큼은 팔려 나갔다. 이 회사에서 기획, 마케팅, 영업, 제작, 홍보를 되는대로 해치우는 나조차 믿기 힘든 현상이었다.
P. 23-24

 

이 이상한 회사의 가장 이상한 부분은 8화에서 등장한 2개의 공고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국제마인드뷰티콘텐츠그룹 호칭 제도 변경
  • Susan ⇨ 이수진 과장
  • Earth ⇨ 오지구 대리
  • DJ ⇨ 김다정 주임

신입 member 채용에 앞서, 조직문화를 바로잡고 결속을 공고히 하고자 호칭 제도를 변경함.

전 member는 업무시간에 사적 친분을 과시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할 것.

국제마인드뷰티콘텐츠그룹 출퇴근 규칙

(1) 출근하면 즉시 대표에게 출근 시간을 보고하고(분 단위), 상급자에게 개별 아침 인사를 건네도록 한다.

(2) 퇴근 시에는 자기보다 직급이 높은 사람들을 전부 찾아가 “더 시키실 일은 없으십니까? 이만 퇴근해 봐도 되겠습니까?”라 묻고 업무 일지를 제출한다.

 

18화 - 경력직 신입 임보정의 등장

직장인의 행복은 어디에 있는 걸까? 이 질문을 하면 수진 언니나 지구는 '월급날'이라고 말한다. 혜은 씨는 단연코 '주말'이란다. 그러나 돈은 사라진다. 주말은 반드시 월요일을 동반하기에 잠깐의 응급처치에 지나지 않는다. 내 생각에 직장인이 행복을 감지할 때는 더 불행한 나락으로 처박혔을 때뿐이다. 불행의 끝까지 내몰려 그나마 살 만했던 과거를 복기할 때. '차라리 예전이 나았지.'라는 너절한 그리움 속에서만 행복이란 허상을 맛볼 수 있다.
P. 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