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를 잊지 못하고 - 김민철

2023. 3. 11. 22:18BOOK

코로나가 일상을 덮친 지 3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던 여행이 갑자기 마려워졌다. 김민철 작가님의 이 책은 여행하지 못하는 상황에 위로를 준다. 하지만 동시에 더욱더 '여행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다.

 

김민철 작가는 각 챕터마다 다른 여행지에서 가족, 친구, 여행지에서 친절을 보여준 현지인, 그리고 알지 못하는 독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각 챕터를 꾸미고 있다. 편지 형식으로 전하는 덕분에 술술 읽히며 책장 넘기는 속도가 빨랐다.

 

 

우리는 우리를 잊지 못하고 - 김민철

 

  • 지은이 : 김민철 
  • 제목 : 우리는 우리를 잊지 못하고
  • 출판사 : 미디어창비
  • 출판 연도 : 2021. 04. 
  • 페이지 : 총 335면 

 

프롤로그부터 훔치고 싶었던 문장들과 여행 사진들이 가득한 책이었다. 아래는 그중 가장 멋졌던 부분이다.

P. 12
프롤로그 중

어느 날, 여행이 사라져버렸습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여행뿐만이 아니라 일상이 사라져버렸죠. 지구가 멈춘 기분이었어요. 집 밖으로 나가는 것도 불가능했으니까. 그 시간이 끝날 것이라는 희망은 너무나 미약했어요. 매일 온 힘을 다해 끌어당겨보아도 희망은 저 먼발치 어딘가에 잠시 앉았다가 날아가버렸죠.

 

P. 25

여행자는 우연을 운명으로 바꾸는 사람이죠. 잘못 본 지도, 놓쳐버린 버스, 착각한 시간, 하필 떨어지는 비. 여행엔 매 순간 우연이 개입하기에 그 우연을 불행으로 해석하고 있을 틈이 없더라고요. 재빨리 음악의 힘을, 커피의 힘을 혹은 술의 힘을 빌리거나, 작은 가게 속으로 피신해서 작고도 단단한 행복을 손에 쥐어보려 저는 애를 씁니다. 억지로 불행의 핸들을 꺾어 행복으로 향하는 거죠. 놀랍게도 그 순간 가끔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나요. 의도하지 않은 삐걱임이 문득 완벽함으로 연결되는 거죠. 그럼 저는 기꺼이 그 우연을 운명이라 믿어버려요. 

 

P. 32

열차에서 내렸더니 바로 옆이 바다였어. 목적지가 없었지만, 바다가 보인다면 순식간에 목적지는 바다가 되지.

 

P. 104

얼마 지나지 않아 태양 빛이 어둠을 차근차근 깨우며 하얀 마르방 꼭대기에서 가장 먼저 도착하더라고요. 하얀 벽마다 노란빛이 슥슥 칠해지고, 나뭇가지 끝에도 노란빛이 내려앉더니, 언덕 아래 스페인 지역의 안개들도 태양이 기세 좋게 밀어내기 시작했어요. 때마침 할머니 한 분이 천천히 빛을 등지고 지나가셨어요. 딱 그 풍경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딱 그 새벽에 어울리는 속도로.

 

P. 129

지금 창밖은 온통 푸른색입니다. 푸른 안개가 리베이라 지구 특유의 색감들을 모두 장악해버렸죠. 빨간색도 노란색도 초록색도 지금은 숨죽이고 있어요. 점점 하늘은 분홍색으로 바뀌어가는 중입니다. 그 색에 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도시의 조명이 하나둘 켜지고 있어요. 곧 사람들은 푸른 안개의 흔적을 잊고 그 노란 조명 아래 모이기 시작하겠죠. 그 조명 아래에서 이 도시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감탄하기 시작하겠죠. 어떤 순간에라도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도시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