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일기 - 미안해 은행나무야

2024. 11. 15. 22:33DIARY

어느 가을밤, 깊은 숨을 몰아쉬는 바람이 거리를 휘감고 지나갔다. 이튿날 아침, 버스 정류장 앞은 가을의 진한 흔적과 함께 낯선 냄새로 가득했다. 밤새 바람이 은행나무 가지를 흔들어 익어가던 은행 열매들이 단체로 떨어진 탓이었다. 금세 그 주변은 은행 열매가 퍼뜨리는 특유의 냄새로 덮여버렸고, 사람들은 코를 막은 채 정류장을 빠르게 지나쳤다.

 

열흘 남짓 흐른 뒤, 문득 익숙했던 풍경 속에서 무언가가 사라졌음을 알아차렸다. 매년 가을이면 노랗게 물든 잎과 함께 열매를 쏟아내던 그 은행나무가 흔적만 남긴 채 사라진 것이다. 그루터기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자리에 서서, 나는 아마도 많은 민원 속에서 나무를 베어낼 수밖에 없었던 공무원의 손길을 떠올렸다.

 

사진: Unsplash 의 Jerry Wang

 

생각해보면 은행나무에게 무슨 잘못이 있었겠는가. 단지 우연히 버스 정류장 근처에 자리 잡은 탓에 많은 사람들의 원망을 들어야 했을 뿐. 은행나무가 암나무인지 숫나무인지는 오랜 세월이 지나야 알 수 있다는데, 자연이 품은 신비를 아직 다 풀지 못한 인간의 과학이 숙제로 남겨둔 일 중 하나일 것이다.

 

그 나무는 단지 제자리에 서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자리와 계절은 그 나무를 짐이자 번거로움으로 만들어버렸다. 짙은 가을의 냄새를 남긴 채 사라진 나무가 어쩐지 안쓰럽고, 조금은 그리워졌다.

 


제보에 의하면 은행나무 암수 구별 숙제는 이미 풀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최근에 심는 은행나무는 선별해서 수나무를 심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