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6. 11. 22:41ㆍBOOK
한줄일기 100일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는 날. 100번째 포스팅에 어떤 책을 소개하면 좋을까를 며칠 동안 생각했지만 마땅한 책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 채로 도서관에 들렀는데 신작 코너에 구병모 작가의 미니 픽션이 놓여있었다. 《로렘 입숨의 책》 독특한 제목이지만 디자인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씩 들어본 단어일 것이다.
그러고 나자 그의 글쓰기는 말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닌데 그야말로 말만 되어서 실상 말이 된다고 보기도 어려운, 문법적으로 틀리지는 않았으나 문법에 맞기만 한, 그것을 이었을 때의 연결고리는 연약하기 짝이 없는 로렘 입숨 같은 더미가 디었다. 행간에 무언가 숨어 있는 듯하나 실은 그 무엇도 없는 말들. 콘텐츠가 아닌 폼과 셰이프를 위해 만들어진 말들. Lorem ipsum dolor sit amet consectetur.
- 로렘 입숨은 1500년대부터 인쇄와 조판 산업에서 레이아웃을 편집하는 데 쓰인 무작위 더미 텍스트를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지만, 읽었을 때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하여 아무 글자나 얹어놓은 것은 아니다. 최초의 로렘 입숨은 기원전 45년 키케로의 《선약론》에서 발췌한 문구를 뒤섞어 놓은 것이라고 하며 그 문구는 다음과 같다. Neque porro quisquam est qui dolorem ipsum dolor sit amet, consectetur, adipisci velit. 고통 그 자체를 사랑하거나 그것을 추구하거나 원하는 사람은 없다.
동사를 가질 권리, P. 71 - 72
이 부분을 읽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난 100일 동안 블로그에 올려둔 일기가 다른 사람에겐 Lorem ipsum 같이 의미 없는 텍스트의 더미겠구나. (설마 작가님도 그런 생각으로 책 제목을 이렇게 붙이신 걸까? 이렇게 글 잘 쓰는 작가님도... 부끄럽다.) 동시에 이런 생각도 했다. 다른 사람에게 Lorem ipsum 같은 글이라도 그 글을 올리려고 매일 짧게는 십여분에서 길게는 몇시간씩 생각을 정리하고 경험을 되새기는 훈련을 한 거니까 꽤 괜찮은 시간이었다고. 100일 프로젝트의 시즌1에서는 구직자 입장에서 남는 시간을 독서와 감상평 쓰느라 이틀에 한 권씩 책을 소개하는 스케줄이 가능했다. 하지만 다시 직장인 모드로 돌아간 지금 출퇴근 시간을 오롯이 투자해도 그런 스케줄을 불가능하다는 걸 확인했다.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책을 읽고 Lorem ipsum 같은 내 생각들을 천천히 정리하고 업데이트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100일 프로젝트의 마지막을 이 책으로 선택한 건 잘한 것 같다.
이 책에는 구병모 작가가 각기 다른 지면에서 발표한 단편 총 13편을 모았다. 13편의 소설이 모두 각각의 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동사를 가질 권리', '누더기 얼굴', '화장花葬의 도시'가 특히 더 인상 깊었다. 취향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당신이 좋아하는 소설 한 편은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추천한다.
- 지은이 : 구병모
- 제목 : 로렘 입숨의 책
- 시리즈 : 미니픽션
- 출판사 : 안온
- 출판 연도 : 2023. 01.
- 페이지 : 총 253면
신인은 제 어깨의 날개에서 깃을 하나 뽑았다. 그 팽팽하고 두꺼운 깃으로, 대지에 힘을 주어 돌바닥을 천천히 긁어내기 시작했다. 신인에게는 영원이라는 시간이 보장되어 있었으므로 조금도 서두를 것 없었다. 이제 막 연주를 시작하여 클라이맥스에 이르기까지 수백 개의 마디와 소절이 남은 음악과도 같은 리듬으로, 특별한 기교 없이 붓을 대었으나 우연히 만난 점과 선에서 경이를 포착한 화가와도 같은 몸짓으로. 신인이 그어 나가기 시작한 선은 언뜻 보기엔 무정형으로 뻗어나갔다.
…
훗날 사람들을 이를 가리켜 나스카의 지상화라고 불렀다.
신인 神人의 유배, P. 57 - 59
매몽 買夢을 청하는 사람의 요구 사항은 간단했다. 매일 꿈을 꿀 것. 낮이든 밤이든 시간대는 상관없음. 다만 매일 이 시간에 나와서 그 꿈 이야기를 들려줄 것. 그러면 자기가 꿈을 듣고 거기에 마땅한 가격을 매겨서 돈을 지불하겠다는 거였다.
영 원의 꿈, P. 46
그 자신을 포함하여 지금까지 존재했던 수많은 작가가 제각기 싸지르거나 게워낸 모든 글은 로렘 입숨의 무한 변주 반복에 불과할지도 몰랐고, 글을 쓰면 쓸수록 아무것도 쓰지 않은 것이 아무거나 쓰는 것과 다를 바 없어졌으며,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그는 비로소 그 무엇도 쓰지 않음 - 세상에 어떤 글도 존재하지 않음이야말로 자신이 꿈꾸던 궁극의 글쓰기임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정적보다 완벽한 음악이 없듯이, 점 하나 찍지 않은 흰 도화지가 화려한 그림을 압도하듯이, 태어나지 않음이야말로 가장 안전한 삶이듯이.
동사를 가질 권리, P. 73 - 74
내가 바란 것은 투명했던 얼굴에 가시적인 형태를 부여하는 게 아니라, 당신들이 나의 투명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뜻이었는데요. 투명한 사람이 서 있는 공간을 투명하다는 이유로 밀치거나 짓밟지 않도록 조금만 신경을 써달라는 거였는데요. 그런데 너의 얼굴을 타인들도 볼 수 있게 만들어주었으니 그에 감사하라고 합니다. 일단 보이기는 하니까 소리는 내지 말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의 이야기를 아느냐, 그가 나중에는 벽을 넘나들지 못하고 벽 속에 그대로 갇혀버리는 것을 아느냐, 너도 벽 속에 들어가고 싶은가 묻습니다… 위협합니다.
누더기 얼굴, P. 219